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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시기 대외정책

담당부서 : 정치군사분석과(02)2100-5876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양극 체제가 형성되었던 냉전 시기 북한의 대외정책은 시기별로 4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는 1948년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중· 소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외교, 2단계는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비동맹국 외교, 3단계는 1970년대 자주외교, 4단계는 1980년대 대서방 실리외교이다.

1. 중·소 사회주의 진영외교: 1948~1950년대 초

북한은 1948년 9월 정권 수립 이후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까지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수립에 정책의 중점을 두었다. 이 시기 북한은 정치·경제적 지원을 얻어 낼 수 있는 우방 국가들과의 외교관계가 필요하였다. 그 중심에 전 세계의 사회주의권 국가들을 이끄는 소련이 있었다. 이에 따라 북한은 소련의 영향권 안에 있던 중국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과는 약 100만 명에 이르는 중공군이 1950년 6·25전쟁에 참전했던 계기를 통해 혈맹 관계를 맺었다. 이후 북한은 중국 중심의 외교에 치우치지 않고 중·소 양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추진하였으며, 그 결과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경쟁적으로 경제원조를 받았다.

2. 비동맹국 외교: 1950년대 중반~1960년대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북한은 전후 복구·건설을 위한 경제지원 획득을 외교 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였다. 특히 중국과 소련으로부터의 무상원조에 중점을 두고 협력관계 강화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소련에서 스탈린 사망(1953년) 이후 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평화공존 정책이 주요 화두로 제기되고, 1955년 4월 반둥회의에서 ‘반둥 10원칙’이 제시되면서 북한의 외교정책은 사회주의 국가들에 국한된 진영외교에서 벗어나 개발도상국 및 비동맹 국가들로 확대되었다. 1960년대 들어 북한은 중·소 이념 분쟁과 남한에서의 군사정권 등장, 쿠바 사태,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 신생 독립 국가들의 유엔가입 증가 등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비동맹국들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 더욱 주력하였다. 이것은 아시아,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의 유엔가입 증가와 1960년 제15차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 동시 초청 문제가 제기 되면서 대남 관계에서의 국제적 우위를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1961년 노동당 제4차 대회에서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와의 단결, 제국주의 진영에 대한 반대 투쟁, 신생 독립국가에 대한 접근 등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목적으로 당시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조·소 우호 협력 및 호상 원조 조 약’(1961.6.), 중국을 방문해 ‘조·중 우호 협력 및 호상 원조 조약’(1961.7.)을 각각 체결함으로써 사실상의 군사동맹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1962년 중·소 국경 분쟁이 격화되자 우방국인 중국 및 소련과의 외교관계에서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해 중·소는 북한에 대한 경제원조의 대부분을 무상에서 유상으로 전환하고 규모도 대폭 축소했다. 대남 관계에서의 우위 확보와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국제적 입지 강화를 모색하던 북한은 1966년 8월 ‘내정 간섭과 호상 평등’을 표방한 자주노선을 선언하고 3세계 개발도상국들을 비롯한 비동맹국 외교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3 자주외교: 1970년대

북한은 1971년 9월 중국의 유엔 가입과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미·중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고, 일본과 중국의 국교 정상화 등 주변환경이 변화되자 자주노선 견지와 경제적 실리 추구를 외교목표로 설정하였다. 이에 따라 1960년대 중반 이후 추진하였던 북한에 우호적인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대외관계 개선에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이 시기에 비동맹국 외교도 적극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그 결과 북한은 노동당 제5차 대회(1970년) 이후 제6차 대회(1980년)까지 66개 국가와 수교하였으며, 3세계 지역에서 중·소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외교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들어 대남도발과 외채상환 문제, 위폐 및 외교관 밀수사건이 발생하면서 북한의 국제적 입지는 약화되었다.

4 대서방 실리외교: 1980년대

북한은 1980년대 들어 경제침체 회복에 중점을 둔 대서방 실리외교를 더욱 확대·강화해 나갔다. 당시 북한경제는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노선, 중공업 우선주의, 경제·국방건설 병진노선 등의 비효율적인 경제정책 수립 및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모순 누적으로 장기 경제침체에 진입한 상태였다. 특히 중국의 개혁·개방 선택(1978년)과 1980년대 중반 이후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전환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한계를 현실로 입증해 줌으로써 북한의 실리외교 추진에 합당한 이유를 제공했다.

이로부터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 비동맹 국가, 3세계 개발도상국,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친선관계에 중점을 둔 외교정책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친선 및 경제협조 관계 확대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1983년 10월 버마(현재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지 폭파 사건’으로 북한의 국제적 위신이 실추되고 서방 국가들로부터 고립을 받는 등 외교 전반에 심각한 손실을 보았다. 결국, 북한의 선진 자본주의 기술도입과 자본유치를 목적으로 한 대서방 실리외교는 큰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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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수용
리수용 출생 1940년
학력 김일성 종합대학교

경력

  • 2016.09 조일우호친선협회 고문
  • 2016.06 국무위원회 위원
  • 2016.06 조선노동당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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